스테이블코인, 은행·국가 자금 유출 '뇌관' 되나

유럽중앙은행(ECB)이 스테이블코인의 급격한 자금 유출 가능성에 대해 경고음을 울렸다. 막대한 규모의 스테이블코인 보유량이 은행 시스템의 뱅크런(bank run)을 촉발할 수 있으며, 이는 국가 경제에도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단순히 위기 상황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서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자금 유출의 '드립(drip-drip)' 효과가 금융 시스템 전반에 걸쳐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지난 2026년 7월 발표한 보고서는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 130개 경제국의 스테이블코인 흐름과 전통적인 외화 예금을 비교 분석한 결과, 두 가지 모두 통화 압력이 고조되거나 은행 및 국가 위기 시기에 함께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스테이블코인 흐름이 자본 통제에 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각국 정부가 자국 통화 가치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하는 자본 통제가 무력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스테이블코인은 자국 통화의 가치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달러 기반의 대안을 제공하며, 이는 현지 정부가 통제를 시도하기 어렵게 만든다. Sphere Labs와 SVB가 지난 9월 발표한 보고서는 이러한 현상이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터키 등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페소로 구매되는 암호화폐의 94%가 스테이블코인으로 나타났으며, 터키에서는 약 380억 달러 상당의 리라가 1년 동안 스테이블코인으로 교환되었다. 이는 경제 불안이 심화될수록 국민들이 자산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Sphere Labs의 최고경영자(CEO)인 아놀드 리(Arnold Lee)는 스테이블코인 채택의 근본적인 동기가 달러 수요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대부분의 경제권은 점차 달러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며, "나는 이러한 전환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를 잘 관리하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달러화 자산 편입이 단순한 투자 트렌드를 넘어, 국가 경제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BIS가 지난 3월 발표한 또 다른 연구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수요 증가는 전통적인 통화 시장에 파급 효과를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27개 법정화폐와 4대 주요 USD 페깅 스테이블코인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스테이블코인 수요 증가는 현지 통화에 하락 압력을 가하고 외환 스와프를 통한 달러 확보 비용을 상승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금융 중개 기관이 이미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더욱 증폭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놀드 리는 "고인플레이션 경제의 시민들이 현지 통화에서 디지털 달러로 이동할 때, 통화 정책 전달 체계가 약화되고 예금 기반이 잠식되며, 중앙은행이 대응할 수 있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압력이 가중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자금 이탈이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효과를 무력화시키고, 국가 경제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BIS 총재는 스테이블코인이 대규모 결제 수단으로는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을 내놓은 바 있으며, 이는 스테이블코인의 성장과 그로 인한 잠재적 위험에 대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Sphere Labs 보고서는 지난 2025년 1월, 미국과 콜롬비아 간의 분쟁 당시 콜롬비아 국민들이 디지털 달러로 자금을 쏟아부었던 사례를 제시한다. 주말 동안 은행과 환전소가 문을 닫았지만, 블록체인 기반의 '카사 데 블록체인(casa de blockchain)'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이는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이나 접근성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규제나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스테이블코인이 얼마나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자금 유출을 촉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중앙은행(ECB)의 경고는 더욱 큰 울림을 준다. 현재 유럽의 암호자산 시장 규제(MiCA)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자는 준비금의 최소 30%를 은행 예금으로 보유해야 하며, 중대한 자산 연동 토큰(ARTs)의 경우 최대 60%까지 요구된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 또한 급격한 자금 유출이라는 근본적인 위협을 완전히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 중앙은행 시스템(ESCB)은 고정된 비율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하고 상황에 맞는 규제 방안을 제안하고 있지만, 스테이블코인의 탈중앙화된 특성과 글로벌한 유동성을 고려할 때, 효과적인 규제 마련은 여전히 큰 과제로 남아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가져올 금융 혁신의 가능성과 함께,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잠재적 위험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와 철저한 대비책 마련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