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의회 대신 규제 당국 손에… "규제 명확성, 이제 당국이 담당"

미국 암호화폐 업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규제 명확성(Clarity Act)' 법안이 상원에서 좌초하면서, 암호화폐 관련 규제 논의의 중심이 의회에서 연방 규제 당국으로 성공적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단기간 내에 여러 규제 당국의 신속한 움직임을 통해 실질적인 규제 프레임워크가 구축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업계는 이러한 변화를 '더욱 실현 가능한 경로'로 평가하고 있으나, 법안 통과보다 느리고 소송에 취약하며 차기 행정부에서 변경될 여지가 있다는 점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지난 2년간 워싱턴 D.C.에서 암호화폐 업계의 주요 전략은 '명확성'이라는 단어에 집약되어 있었다. 시장 구조에 관한 법안이 통과되면 다른 규제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지난주 상원에서 49대 50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Clarity Act'가 좌초되면서 결정적인 벽에 부딪혔다. 60표 이상이 필요했던 이 법안은 거의 1년 이상 논의되었으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암호화폐 관련 사업 윤리 조항을 둘러싼 협상이 결렬되면서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3명의 공화당 의원마저 이탈하면서 가결에 필요한 표를 얻지 못했다. 법안 설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신시아 럼미스 상원의원은 사실상 연내 통과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법안의 실패가 규제 논의 자체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규제 공백을 메우기 위한 연방 규제 당국들의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불과 48시간 만에 여러 규제 기관들이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가장 눈에 띄는 행보를 보였다. 폴 앳킨스 위원장은 'Clarity Act'의 실패를 직접 언급하며 새로운 '혁신 면제(innovation exemption)'를 발표했다. 이 프레임워크는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거래소들이 온체인 상에서 토큰화된 미국 주식을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이를 위해 기존의 국가 증권 거래소 등록 절차를 면제해 준다. 이는 SEC가 의회의 입법을 기다리기보다는 자체적인 권한을 통해 암호화폐 정책을 수립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여준 사례다.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역시 동시 다발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CFTC 직원은 암호화폐 지갑 앱을 포함한 수동적 소프트웨어 제공업체들이 규제 파생상품에 대한 사용자 접근을 허용하되, 소개 브로커(introducing broker)로 등록할 필요가 없다는 '무조치(no-action)' 입장을 발표했다. 더 나아가 CFTC는 백악관에 광범위한 암호화폐 시장 규제안을 검토 요청했으며,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연방준비제도(Fed)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연준은 지난 목요일, 감독 대상인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발행한 토큰에 대해 안전하고 유동성이 높은 자산으로 전액 담보를 유지하고, 운영 위험에 대한 자본을 보유하도록 요구하는 규제안을 제안했다. 이는 2025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서명한 스테이블코인 법인 'GENIUS Act'의 다자간 시행의 일환으로, 통화감독청(OCC) 역시 1월 법정 마감일을 앞두고 자체적인 스테이블코인 규제안 최종 확정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 암호화폐 규제 환경은 단일한 의회의 법안 통과보다는 개별 규제 당국의 규칙 제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구축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대체로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솔라나 정책 연구소의 크리스틴 스미스 대표는 "이제 우리는 규제 당국으로부터 지침을 얻고자 한다"고 언급하며, "기관들이 우리 산업을 어떻게 지원하고 혁신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경로를 제공해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는 규제 당국의 움직임이 업계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SEC, CFTC, 연준, OCC와 같은 기관들이 개별적으로 진행하는 규제안들은 의회 법안에 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규제 제정 과정이 훨씬 느리다는 점이다. 법안 통과를 위한 수개월 혹은 수년간의 협상 과정 대신,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시간이 소요된다. 둘째, 법원에서의 소송에 더 취약하다. 의회가 제정한 법률은 행정 명령이나 규제 당국의 규칙보다 훨씬 강력한 법적 구속력을 가지며, 법원에서 뒤집히기 어렵다. 셋째, 차기 행정부가 바뀔 경우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보다 기존 규제 당국의 규칙을 변경하거나 폐기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는 정치적 취약성을 가진다. 이러한 점들은 규제 당국 주도의 규제 환경이 가져올 잠재적인 불확실성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계는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의회의 교착 상태에 빠져 장기간 기다리는 것보다, 규제 당국과 직접 소통하며 실질적인 규제 프레임워크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라는 판단이다. 이러한 전환은 암호화폐 산업이 성숙해나가고 주류 금융 시장에 더욱 통합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단계로 여겨진다.